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키포로스 1세 (문단 편집) === 외정 === 일단 첫타는 7세기~8세기 초까지 이어진 대혼란 와중에 제국 영내로 떼로 몰려온 [[슬라브인]]이었다. 이들은 토착민들을 쫓아내거나 동화시키는 등의 과정을 통해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서 눌러앉았으며 대혼란 와중에도 제국이 가까스로 행정력을 유지한 동트라키아 지방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 아티카 지방, 테살로니키 주변을 제외한 그 외 나머지 지역은 제국의 행정력이 완전히 박살난 무법천지였다.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니키포로스는 지금의 그리스 일대인 테살리아와 이피로스, 마케도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 등을 회복해 테마를 설치하였으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슬라브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제국의 신민으로 동화시킴과 동시에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그리스계 유민들을 대거 정착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를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콘스탄티노스 6세]] 때에 시작되었지만, 콘스탄티노스 통치 말기와 이리니 때에는 국내정치 혼란 및 카롤루스의 황제대관, 혼사 등이라는 외교문제에 밀려서 잠정적으로 중단 상태에 있다가 니키포로스가 마무리를 지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claveni|Sclaveni]](남슬라브인들의 공통조상) 문서를 보면 이 내용이 나오는 즈음에서 re-Hellinzed 및 re-Hellenization, 즉 재그리스화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와 있다. 이후 그리스는 4차 십자군으로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헤라클리우스 이후 7세기 중반~8세기 동안에 동로마가 발칸반도(그 중에서도 그리스)를 제대로 영유하고 있다고 나오는 지도나 영상이 종종 있는데,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틀린 것이다. 온라인 브리타니카 백과에도 그리스 수복에 있어 주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전통적으로 니키포로스 1세의 공적으로 여겨진다고 나와 있으며[* [[https://www.britannica.com/place/Greece/Byzantine-recovery]] 중, 'The emperor Nicephorus I is traditionally credited with a major role in this, although the process was certainly under way before his accession.'], 위키백과에도 제대로 된 성공적인 수복은 니키포로스 1세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claveni|Sclaveni]] 중, 'A serious and successful recovery began under Nicephorus I (802–811).'] 그 다음은 [[아바스 왕조]]와의 대립이었다, 당시 칼리프였던 [[하룬 알 라시드]]는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을 요구하였는데,[* 이 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선황제인 이리니 시절에는 싸움을 피하고자 바쳤던 조공을 새 황제가 즉위하고 바치지 않자 하룬 알 라시드가 "너희들 조공 바치기로 해놓고 왜 안 바치냐."고 추궁해온 것에 가깝다.] 니키포로스 1세는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805년부터 806년까지 양측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는데, 동로마군이 크게 패하는 바람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강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아바스 왕조에 대한 니키포로스 1세의 외교적 실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분명 사방에 불가르족이나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 같은 막강한 적수들을 두고 있으면서 니키포로스는 이슬람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하룬 알 라시드와의 평화 조약을 무려 세 번이나 본인 쪽에서 어기면서 강력한 적을 본인 손으로 더 늘렸다. 물론 이는 전대 황제인 이리니 시절 맺어버린 불평등한 평화 조약을 제국의 위신을 생각해서, 막대한 조공 금액이 아까워서, 제국 귀족들의 요구 때문에서라도 깨뜨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슬람 아바스 조 시기 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리니 여제 시절에는 동로마 제국 측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자처하며 아바스 조 쪽을 우대하는 문맥의 글로 외교 문서를 써서 외교관을 보냈는데 니키포로스 1세가 즉위하면서 아바스 조 쪽을 로마 황제에게 통보를 받는 지방 군주 쯤으로 격하시키는 표현의 글로 외교 문서를 써서 외교관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외교문을 통보받고 하룬 알 라시드가 너무나 격분하여 당시 궁정에 있던 대소신료들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하룬 알 라시드 입장에서도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이 국경을 넘어 호라산 일대를 약탈하려고 들고 하마단 총독의 반란 획책 소문 등으로 제대로 된 침공을 하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아바스 왕조 최대 전성기였던 이 시기에 사방에 적을 둔 니키포로스는 이 때 잘못했으면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2번째로 평화 조약을 파기했을 때에는 당시 하마단 총독을 추궁하려 병력을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라시드가 매우 분노하여 약 14만여 명의 대군을 소집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어버렸다. 라시드가 만약 좀 무리를 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성하려고 들었다면 어떤 사태로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결국 다시금 조공을 바치겠다고 허리를 굽혔으며 하룬 알 라시드는 이에 동의하여 병력을 철수시켰다. 한편 806년에는 여전히 동방 제국의 제위를 탐내던 [[카롤루스 대제]]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을 공격하여 맞서 싸워야만 했다. 다행히 카롤루스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이 지역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이 지역을 놓고 벌어진 분쟁은 훗날 니키포로스 1세가 죽고 난 후 맺어진 조약에서 동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영토로 인정받으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최대의 골치거리는 불가르족이었다. [[크룸]]이 [[칸]]으로 등장하면서 [[제1차 불가리아 제국|하나로 통일된 불가르족]]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위협하였으며, 제국의 영토에도 자주 침입하였다. 특히 초창기에는 불가르족에게 밀려난 슬라브족들이 제국 영토로 대거 침입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에 황제는 제국민들을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이주시키고, 제국에 침입한 슬라브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정착을 도우면서 안정을 꾀하였다. 사실 이전부터 추진하던 정책이긴 했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밀어붙여 [[콘스탄티노스 5세]]가 거둔 귀중한 발칸에서의 군사적 성과 토대를 정치적, 경제적 성과로 굳힌 것이 니키포로스 1세다. 다음으로 불가르족의 위협에 군사적으로 맞대응하려 하였다.([[크룸 전쟁]]) 불가르족의 약탈이 계속되자 809년에 불가르족의 수도였던 플리스카를 털어버렸으며 아나톨리아의 테마 부대들과 타그마 부대들을 총동원하여 811년에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였다. 1년간 철저하게 준비한 전쟁이었던 덕분에 초반에는 [[크룸]]의 불가르족들을 [[개발살]]냈는데 이 때 크룸이 당황하여 사절을 보내 화평을 애걸할 정도로 위세를 날렸다. 하지만 이 참에 불가르족의 위협을 뿌리채 뽑아버릴 심산이었기에 화평을 거절하고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